독일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붕괴 이유와 의미

30년전인 1989년 11월 9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되어 있던 나라였던 독일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던 날입니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장벽이 무너지면서 1년여 뒤 독일은 정식 통일에 이르게 됩니다. 베를린장벽 붕괴 30두년을 맞아 그 이유와 의미 그리고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 분단과 베를린 장벽 건설

2차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히틀러, 나치가 연합국에 패배하며 1945년 5월 독일은 항복을 선언하였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4년이 지난 1949년 5월에는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관할하고 있던 지역에서 독일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서독이라 부르는 지역입니다. 같은 해인 1949년 10월에는 소련에 점령되고 있던 동부지역 독일에 독일 민주공화국이 수립되며 두 국가로 분단이 시작되었습니다. 흔히 서독, 동독이라 부르는 독일 분단의 시작이었습니다.

4개국에 분할 점령된 독일
육지의 섬과 같이 고립된 서베를린 지역(동독쪽 노란색 부분)

이때 수도 베를린은 동독 영토에 위치하고 있어 사실상 동독에 속하는 지역이었지만 수도라는 지위가 있어 점령국들에 의하여 역시 동서로 나누어 분할하게 되며 동서 베를린으로 나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북한 지역에 서울이 있는데 그 서울을 남과 북으로 나누어 북한쪽 북서울 대한민국쪽의 남서울 이런 식으로 나눈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습니다. 베를린 시민들은 갑자기 서로 다른 체제의 국가가 들어 서며 큰 혼돈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자유 서베를린 시민들은 고립된 육지 속의 섬에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철조망을 점검하는 동독병사들과 이들을 호기심있게 쳐다보는 서베를린 시민들. 긴장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4개국 관할로 들어간 베를린 시, 우측 동베를린이 소련 점령 지역
베를린 국경
베를린 철조망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베를린 장벽은 분단 이후에 바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며 두 지역을 구분하는 것은 철조망과 울타리 그리고 국경 경비대가 상주하는 감시 초소가 다였으니 오늘날 한반도에 놓여있는 DMZ 철책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월담을 하거나 선을 넘어가는 방식으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오는 탈출자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동독 정부는 탈출을 막기 위하여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에 이르렀고 1961년에 양 지역을 구분하는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지며 1989년까지 28년간 동서베를린을 가로막는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있게 됩니다.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 구간
철조망을 넘어 오는 동독 병사

베를린장벽 붕괴 이유, 오보

장벽이 건설된 이후에도 많은 동독 주민들이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한 이들도 꽤 많이 있었지만 탈출하지 못하고 사살당한 이들도 130명 이상이라고 하니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굳건할 것 같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 것이 1989년 11월이었는데 그 해 동독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빗발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가 실각하였으나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소련도 도움을 줄 수 없었고 결국 동독 공산당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장벽 붕괴는 일종의 오보로 시작이 됩니다. 11월 9일 당일 제한적인 여행의 자유화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권 발급 기간 단축 등 별다른 의미는 없는 자리였는데 이탈리아 외신 기자의 질문과 당시 발표자였던 귄터 샤보프스키의 답변이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베를린 장벽 너머 동베를린

당시 기자는 “국경이 언제 개방되느냐’고 물었는데 샤보프스키는 이에 “지연없이, 즉시’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이탈리아 기자는 장벽이 개방, 붕괴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이 내용을 긴급 타전하게 되고 곧바로 전세계로 긴급 속보로 전해지기 시작했고 서독 방송을 통하여 동독 지역에도 전달되면서 동베를린 주민들이 장벽으로 대거 몰려들어 부수었습니다. 엄청난 인파들이 몰려들면서 동독 국경수비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며 그 밤이 지나며 현대 세계사의 드라마틱한 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 오보니 뭐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장벽은 무너졌고 계속 부수었으니 물질적인 장애물도 사라졌던 것입니다. 이후 양 지역간의 이동은 자유로워졌고 1990년 중반에 이르면서는 거의 모든 장벽이 사라졌고 1990년 10월 드디어 독일은 재통일을 선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오보의 주인공 샤포브스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동독 국경수비대

통일 이후 30년

이제 2020년이면 독일 통일 3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장벽이 무너지고 불과 1년만이라는 빠른 시간에 통일이 된 것인데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 그 후유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동서독간의 경제력의 차이가 있었던 상태였는데 분단 이전의 독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도 동서간의 격차가 심한 것 같습니다. 동독 지역의 재건을 위하여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경제 상황과 실업률은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이는 양쪽 국민들로 하여금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현재 동독 주민들의 GDP는 서독 주민들의 GDP의 75% 수준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된 수준이며 EU국가내에서도 낮은 수준은 아니지만 서독 지역과 비교하면 낮다는 것이 비교가 되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 독일의 지역별 경제 격차
독일 극우 시위대

이런 환경에서 동독 지역에서 극우 세력이 준동하고 과거 공산 세력까지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분단 국가인 우리 나라에도 이런 드라마틱한 통일의 순간이 갑자기 올 지는 모르겠으나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가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해줍니다. 통일 보다는 그 이후를 더 걱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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