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 신유박해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유배되었던 정약전, 정약용 형제

2005년작 왕의 남자를 연출하며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이준익 감독이 올해에도 신작 영화를 내놓으며 다시 관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지었던 책의 이름인 ‘자산어보’를 토대로 만든 동명의 영화입니다.

일단 영화를 본 느낌은 상당히 잘 만들어진 영화로 생각됩니다. 유배지인 흑산도를 배경으로 하고 바다 생물이 많이 등장하다 보니 푸른 바다가 많이 보여야 하는데 모든 장면을 흑백으로 처리한 것이 인상적이었으며 한편의 수묵화를 보는 느낌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이제는 컬러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흑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는데 이렇게 흑백 영화로 제작된 영화를 보는 것도 새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 자산어보

자산어보

영화 자산어보는 저자인 정약전이 유배를 당하기 전 있었던 배경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동생인 정약용과 함께 고문을 당하는 모습 그리고 동생과 함께 귀양길에 오르고 헤어지는 장면이 초반부에 나오고 이후 유배지인 흑산도를 배경으로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과 교류하며 관찰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 줍니다. 

정약전
자산어보

지체높은 사대부이며 명문가의 양반인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는 동생인 정약용보다 더 험한 길이었으며 사실상 죽기전에는 나갈 수 없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본인도 그런 환경과 상황임을 직감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며 대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며 이전에는 양반들이 관심을 전혀 주지 않았던 날 것의 세계에 빠지며 하나 하나 기록을 남기고 결국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펴냅니다. 영화를 보면 창대라고 부르는 젊은 청년으로부터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고 그렇게 얻은 내용을 친히 책으로 펴낸 것인데 아무리 유배를 떠나온 선비이기는 하지만 신분의 차이가 거의 하늘과 땅차이인 평민들과 함께 교분을 하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파격적인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거의 수탈의 대상이에 불과했으며 집권층을 비롯한 사대부, 호족들은 백성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왕권은 나라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고 사대부, 세도가들은 그들의 잇속을 차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조선의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나마 정조 임금이 있던 시기는 개혁 정치가 실현되고 왕권도 강화되었으며 학문적으로 우수한 학자들이 대거 등용되는 등 조선 후기 마지막 중흥의 시대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가 죽은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고 본격적인 세도 정치가 시작되며 이때부터 조선은 사실상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정조 임금

정조 임금 집권시기인 18세기에는 청나라를 통하여 서양의 과학기술, 문화, 사상, 종교 등이 조선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들어온 종교가 천주교인데 이러한 이유로 서학은 천주학으로도 지칭되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질서와 유교의 세계관과 확연히 다른 천주교 신앙은 고통에 신음하던 백성들과 일부 지식인들과 사대부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정조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은 덜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기본적으로 조선 왕조와 유교인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는 혁명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이며 정조의 죽음이후 필연적으로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으며 거기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정약용, 정약전 형제도 있었습니다.

정약용 가계도
정약용

신유박해

19세기가 시작된 1800년 8월 정조 임금은 48세의 나이에 승하합니다. 그가 할아버지였던 영조 임금만큼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은 조금이나마 더 발전하였을 것 같은데 아쉬운 부분입니다. 1801년 그의 어린 아들인 순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후 정치적으로 정적에 가까웠던 영조비 대비 정순왕후는 정조 시기에 이루었던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기 시작하였으며 대표적인 사건이 1801년 신유년초에 있었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입니다.

정조 임금과 달리 정순왕후는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개시하며 수많은 신자들과 관련된 정치인들을 잡아들이고 처형시키거나 유배를 보냅니다. 조선의 마지막 붕당 집권세력으로 불리는 노론도 권력 유지를 위하여 반대편에 서있던 남인 세력을 배척하는데 앞장섰으며 여기에 남인으로 분류되는 정약용, 약전 형제도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천주교 세례를 받았던 약전, 약용 형제도 이때 유배를 가게 됩니다. 형제중 정약종은 이때 처형됩니다. 다행히 두 형제는 이때는 배교를 선언하며 천주교를 멀리하였으므로 그나마 목숨을 건진 것인데 이때 처형되었더라면 오늘날 전해지는 수많은 명서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자산어보 같은 명저는 유배 시기에 저술된 책들입니다. 신유박해 당시는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포항쪽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신유박해

황사영 백서 사건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었던 천주교 신자 탄압은 같은해 황사영이라는 사람이 쓴 백서(편지)가 발각되면서 더욱 큰 사건으로 번지게 됩니다.

황사영
황사영 백서

황사영은 정약용의 배다른 형인 정약현의 딸과 혼인한 사이로 약용, 약전 형제에게는 조카 사위가 되는 인물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15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고 하니 천주교만 아니었다면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더욱이 정조가 총애하는 정약용의 조카사위이니 배경도 좋았습니다. 이런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며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받는 와중에 청나라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 탄압을 알리며 여러 가지 요구사항이 적힌 편지를 보냈으니 이것이 황사영 백서입니다. 이 편지를 통하여 그는 서양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위협할 것, 신부를 상주시킬 것,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거나, 청의 공주를 조선의 왕비로 삼아 충성의 기초로 삼을 것 등을 전하려 하였으나 중도에 발각되어 처형되고 맙니다. 아무리 좋게 이해를 하려고 해도 신앙의 자유를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은 지금 봐도 무모하거나 황당무계한 공상으로 보입니다. 이건 나라를 그냥 바치자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너무 나간 것으로 당시 위정자들에게 더한 탄압의 빌미만 줬을 뿐이며 호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사건으로 정약전은 다시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되고 정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귀양길을 가게 됩니다. 이 사건만 없었어도 두 형제의 운명은 조금 더 바뀔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자산어보에 대하여 정약전이 지은 책이라는 것만 알았지 깊이 있게 생각을 못해봤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대단한 책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의 세계관을 그대로 실천한 것으로 그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것을 백성들의 도움을 받으며 책으로 완성한 것이니 정약전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새삼스레 느끼게 됩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 책이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인데 그의 혜안과 노력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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