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결말 임오화변, 영화 사도 배경

조선 왕조는 세계역사에서도 드물게 500년을 이어간 왕조로 기록되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1392년 고려의 명망있는 장군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마지막 왕인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이 519년을 이어간 나라였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조선은 중세로부터 근세를 이어가며 현재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한 왕조 국가입니다. 19세기 이후 집권한 순조 임금 이후의 역사는 사실상 왕은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전락하여 왕권은 땅으로 실추하고 소수 양반가들인 안동 김씨 일족 같은 세도 정치에 휘둘리며 멸망을 재촉하였는데 그렇게라도 100년을 망하지 않고 이어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그래도 왕명이 먹히고 임금이 임금다운 역할을 하기도 한 시절이 있었으니 영, 정조 시대입니다. 52년을 집권하며 조선 왕조를 최장수 통치했던 영조와 그의 손자 정조 시대는 마지막으로 조선이 부흥을 꾀했던 시기였는데 이후 급속도로 나라가 기울어진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영조의 아들이 왕이 안되고 그의 손자인 정조가 왕이 된 것은 아들인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고 끝내 뒤주 속에서 목숨을 거두고 말았던 비극적인 사건 임오화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사도는 조선 왕조 최대의 비극인 임금 아버지와 세자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 사도

영화 사도

영화 사도는 조선 제 21대 왕이었던 영조의 아들이었던 사도 세자의 죽음과 두 부자 간의 갈등을 소재로 한 역사 실화를 다룬 영화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했으며 송강호(영조), 유아인(사도세자), 문근영(혜경궁 홍씨)이 출연하여 주연을 맡았습니다. 상영 시간은 125분이며 극장 개봉은 2015년 9월이었습니다. 최종 관객수는 624만명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하였고 대체로 좋은 평가를 얻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최대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사도세자 이선과 영조의 갈등은 워낙 충격적인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어 소설이나 드라마에도 종종 등장하고 있는 소재입니다.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부터 사망할때까지의 8일간을 일짜별로 보여 주며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며 사도세자와 영조 두 부자간의 갈등이 어떻게 이어지고 증폭이 되며 파국을 맞게 되는지를 두 사람의 관점에서 가감없이 보여 줍니다. 아버지인 영조의 입장에서 볼때 어렵게 얻은 아들은 그의 기대와 다르게 공부에 충실하지도 않고 어렵게 이어온 자신의 치세와 정치관을 뒤엎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실망하게 되어 학대에 가까운 질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영조가 세자를 책망하고 무시하는 장면이 거의 대부분인데 실제로는 더했을 것 같습니다. 영조 역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가 매우 돋보였습니다. 세자의 존재 자체가 역모라며 쏘아 붙이는 영조의 대사는 이미 그를 아들로서도 후계자로도 인정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유아인이 맡은 사도세자는 그런 아버지 왕의 병적인 기대와 책망을 견딜 수 없는 세자 아들의 모습인데 영화 전편을 통하여 안타까운 마음만 들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크게 아버지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단지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하고 좀더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저렇게 멸시를 당해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두 사람이 어긋난 지점은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노골적으로 미워하고 아들은 이를 이기지 못하며 점점 미쳐가는 시점인데 이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집니다. 유아인의 광기어린 연기는 영화의 긴장도를 증폭시켜줍니다. 어린 아들인 왕세손, 훗날 정조만이 그의 편이 되어 주지만 두 사람의 파국을 막을 수 없는데 영조 임금이 그런 손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더욱 슬픔을 안겨줍니다. 역사적인 실화이기 때문에 결말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이 떨어지거나 하지 않으며 촘촘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 변화를 제대로 보여주며 집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임오화변 

이렇게 영화에서는 끝내 파국에 이르는 두 부자간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 임오년 1762년 5월 13일(음력) 영조 38년에 있었던 임오화변입니다. 

임오화변에 이르기 전 이미 두 부자간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는데 영조의 학대로 거의 미쳐 버린 사도세자는 사람을 이유없이 죽이고 외부에서 기행을 일삼는 등 용서받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어릴때 영특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고도 하는데 성장하면서 기대와 달리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는 등 모습을 보이면서 견제와 의심의 대상으로 변하게 되고 이를 간파한 집권 세력인 노론의 무시도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미래에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달가와 하지 않았을 것이며 갈등을 부추키거나 방치하는 방식으로 세자를 제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왕을 정점으로 하여 집권세력인 노론, 같은 일파인 처가 풍산 홍씨들, 그리고 친모인 영빈 이씨까지 그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왕비인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치한 인물로도 의심받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감싸기 어려운 처지였으며 아들인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지만 그 보다는 본인 집안의 정치적인 입지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많습니다.

임오화변 당일 분노에 찬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일부 신하들이 뜯어 말리면서 그런 사태는 피하였지만 그를 죽이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변하지 않아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8일간을 갇히고 밥도 못 먹고 물도 마시지 못하며 더위와 탈진 속에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7월이었으면 더운 날씨였을 것입니다. 비라도 왔으면 모를까 더위속에서 좁은 뒤주 속에서 갇혀 살아 남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영조는 끝까지 지켜 보았다고 하며 아들이 죽고서야 환궁을 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개선가를 울리고 행차를 하는 영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부 신하가 속삭이듯이 아들 죽이고 개선가를 울리고 환궁하는 독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사도세자를 미쳐버리게 한 것에는 영조가 큰 원인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아들의 죽음이후 추모를 하고 사도세자라는 호칭을 내려주기도 합니다. 아무리 미워했다고는 하나 아들이었으니 슬픈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손자인 세손을 끝까지 보호해 주고 그가 왕에 오르게 도움을 줍니다. 

조선 21대왕 영조
조선 22대왕 정조 어진(상상도)

임오화변으로 죽은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의 갈등은 오늘날에도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아버지 아들 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그 만큼 요구하는 것도 많은데 세상의 모든 아들 들이 그렇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기대와 욕심을 조금 버리고 아이들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잘 파악하고 많은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서로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는 자세와 이해가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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