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연인 배경 조선 인조 가계도, 아들 효종, 소현세자, 병자호란

MBC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연인은 조선 인조기대에 벌어졌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역사멜로 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최고 시청률 12%(순간 최고 13.4%)를 기록하며 드라마 부분에서 1위에 올라 있는데 역사를 다룬 내용에다 배우들의 명연기가 어우러져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 연인의 시대적 배경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후 청의 침략인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전란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냥 무능 그 자체인 인조로 말미암아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왕은 그저 자리 지키기에만 전전긍긍하고 아들을 시기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들이 드라마에서 보여집니다. 조선 제 16대 국왕인 인조와 그의 가계도, 병자호란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인조시대 배경인 연인

인조와 병자호란

인조는 1595년(선조 28)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이종(李倧)이며, 자는 화백(和伯)입니다. 선조와 인빈(仁嬪)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5남 정원군(定遠君 : 추존왕 元宗)의 맏아들로 선조의 손자입니다. 능양군으로 불린 그가 몰아낸 15대 왕 광해군은 아버지인 정원군의 이복형이니 조카가 삼촌을 몰아내고 왕이 된 것입니다.

드라마 연인에서의 인조

정권 기반이 취약했던 광해군의 무리한 ‘폐모살제’와 전란이후 피혜한 상황에서 벌인 궁궐증축 공사, 집권당인 북인의 미숙한 정치력, 신흥 세력인 청에 대한 중립적인 태도에 불만이 가득했던 서인 세력이 광해군에게 가족을 잃고 감정이 좋지않은 능양군(인조)를 내세워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옹립한 것이 인조반정입니다.  기존 왕을 몰아내고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덮어야 명분이 서게되니 인조와 친명을 주창하는 집권 서인세력은 당연히 후금(청)에 대하여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고 이에 청은 직접 조선으로 쳐들어와 손을 보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입니다. 아무런 전쟁 대비도 제대로 못한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인조은 급하게 도망가느라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1636년 12월 1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엄동설한에 벌어진 병자호란은 이북 지역에서 청의 10만 군대가 수도 한양으로 진격한 것으로 그 속도도 매우 빨라 심양에서 출발한 군대가 한양에 다다른 것은 불과 10여일만이었습니다. 강화도로 대피할 시간도 없었던 인조가 선택한 곳은 남한산성이었습니다. 청군의 침략으로 수도 이북, 서북 지역의 피해가 특히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청난 약탈이 자행되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청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됩니다. 왕도 끌려나가 무릎을 끓는 치욕을 당하고 그의 아들들도 볼모로 청에 끌려가는 신세였으니 일반 백성들의 처지야 더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드라마 연인은 임진왜란 이후 잠시 평화롭던 조선에 오랑케, 청군이 쳐들어온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얶던 민초들의 이야기입니다. 전혀 낭만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도 사랑이 있고 전란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조선으로 쳐들어오는 청나라 병사들

조선 인조 가계도, 효종, 소현세자

인조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첫째 장남이 소현세자이며 둘째는 후에 효종인 봉림대군입니다. 후손으로는 6남 1녀를 두었는데, 인열왕후 사이에서 4남, 후궁에게서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셋째는 인평대군으로 양자로 능창대군(綾昌大君)의 뒤를 이었습니다. 인조는 인조는 1649년(인조 27) 승하하였으며, 나이는 55세, 왕위에 있은지 27년이던 해였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이후 소현세자와 일군의 신하들이 인질로 끌고 간 상황에서, 왕위를 교체할 수도 있다는 압박을 당한 인조는 재위기간 내내 괴로웠을 것입니다. 오랑캐로 업신여기던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직접 행한 자괴감과 정치적 압박은 수난이었을 것입니다. 병자호란 이전에는 그래도 내정개혁에 힘쓴 면도 보이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정책이 없습니다.

소현세자는 그의 장남이자 적장자로 청에 볼모로 끌려간 이후 조선과 다르게 대국의 면모를 갖춰가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발전하고 있던 신흥 제국의 모습을 보고 세계사적 소양까지 갖추게 됩니다. 함께 볼모로 끌려간 둘째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다르게 그런 형을 못마땅하게 보고 조선에 있는 인조에게 알리기에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청과 잘 지내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알린 것으로 인조는 그런 소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세월이 지나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두 왕자 앞에는 다른 운명이 기다립니다. 청의 문물을 받아 들이고 조선을 개혁해야하겠다는 의지에 충만했던 소현세자는 인조로부터 차가운 냉대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으로부터 치욕을 받았던 인조 입장에서는 그들을 본받겠다는 세자도 밉고 더 나아가 자싱의 자리마저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조선으로 귀국한지 불과 두달이 지나 소현세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아들이 죽어도 전혀 슬퍼하지 않고 세자빈인 강씨까지 사약을 먹이며 죽인 인조의 당시 행태를 보면 인조가 개입한 독살로 소현세자가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이후 둘째 봉린대군이 세자가 되고 인조 승하후 제 17대 국왕이 되니 바로 효종이다. 그는 현대에는 청에 대한 북벌론을 주창한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한 측면으로 이해됩니다. 효종은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는 등 붕괴되고 망가진 조선의 시스템을 정비하고 기강과 기초적 군사력을 다듬는 일에 주력한 왕입니다. 청의 문물도 어느정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는데 종기 치료중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뜻을 펴지 못하고 승하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연인 드라아 속 소현세자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

이상과 같이 인조 가계도, 그의 두 왕자, 병자호란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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