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폭력, 미국 흑인 사망에서 촉발된 폭동 시위

미국 경찰관에 가혹한 행위에 의해 흑인 사망 사고가 발생하며 미국은 또다시 인종 차별에서 비롯된 갈등이 고조되며 폭동과 시위가 극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명백한 국가 공권력의 폭력에서 비롯된 사태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최 선봉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에서 중국이나 다른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인종 차별과 국가로 대변되는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이 빚어낸 어두운 일면을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과연 미국이 선도 국가인지 선진국이 맞는지 코로나 19 상황과 맞물려 여러 모로 의구심을 일으키고 있는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건의 전개와 폭동 양상,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 차별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미국 흑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학대의 역사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미국 역사에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던 흑인들은 오랜 옛날 로마의 노예들이 그랬던 것처럼 백인들이 세운 신생국에서 그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였습니다. 미국 남부에서 면화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전하며 모자라는 일손을 메꾸기 위하여 흑인들이 제대로 된 대접은커녕 노예가 되어 유럽 중세시대와 같은 농노가 되었던 것입니다. 공업 중심 지역이어서 노예가 필요하지 않았던 북부와의 대립으로 벌어진 미국의 내전 남북전쟁의 발단도 바로 이 노예 제도입니다.

남북전쟁은 북부의 백인들이 흑인들을 존중하고 더 인권을 중요시하여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연방 유지와 노예 제도를 놓고 대립을 한 남북부의 대립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결과적으로 북부가 승리하면서 노예 제도는 1870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뿌리깊게 이어져 온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예 제도는 1870년 폐지되어 흑인들은 더 이상 노예는 아니었지만 1960년대까지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공식적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영화 그린북을 보면 사회적으로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는 흑인도 차별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농노였던 흑인들
노예제도 갈등이 일으킨 미국 내전, 남북전쟁

그저 차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학대가 자행되어 왔는데 20세기 초반부터 남겨진 사진이나 역사를 보면 흑인들의 삶이 매우 비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흑인들에 대하여 KKK단 등 민간인 차원에서의 무차별한 학대가 자행되고는 했는데 90년대 이후는 경찰 등 공권력에 의한 과도한 행위가 문제되고 있습니다. 1992년 흑인 운전자에 대한 백인 경찰관의 무자비한 폭행과 그들에 대한 무죄 판결에서 비롯된 LA 폭동도 그 맥락입니다. 당시 폭동은 엉뚱하게 한인들과 흑인들간의 갈등으로 번지며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었습니다.

1992년 LAX 폭동의 계기가 된 로드니 킹 사건
1992년 LAX 폭동 사건

미국 미네소타 흑인 사망 사건


지난 25일 미국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된 백인 경찰관의 무자비한 제압으로 비무장 흑인이 결국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매체를 통하여 전달된 영상과 사진을 보면 흑인 범죄 용의자는 수갑을 찬 채 땅바닥에 엎드려 누워 있어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백인 경찰은 무릎으로 그의 목을 찍어 누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과도하고 있어서는 안될 무력 행사였는데 백인 경찰은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무려 8분 이상 그의 목을 찍어 누릅니다. 흑인 용의자가 숨을 쉴 수 없다며 살려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의식을 잃었고 끝내 사망에 이르고 맙니다.

폭동을 촉발시킨 경찰의 폭력

백인 경찰의 행동을 보면 전혀 죄책감도 없으며 흑인 용의자를 죽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입니다. 고의성이 다분한 악질적인 공권력 행사였던 것입니다. 용의자가 백인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서 나온, 그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공권력 행사였다고 믿었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3급 및 우발적 살인 혐의로 기소된 상태입니다. 경찰 공권력이 막강한 미국에서도 경찰이 기소될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경찰에 항의하는 시민들

미국 폭동 시위


이 사건으로 촉발된 항의 시위는 날로 격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급기야 백악관 앞에서까지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트럼프는 연방군 투입까지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난 1992년 LA 폭동 당시보다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이번 폭동은 가뜩이나 코로나 19로 어려운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어서 사람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고 공격적으로 나오게 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트럼프의 경솔한 대처와 발언도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폭동이 항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점 약탈, 방화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일탈 행위는 흑인에 대한 동정심이 생기다가도 공감을 반감시키고 있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흑인 시위대의 이러한 행동은 안 그래도 폭력적인 경찰, 군인 등 국가 공권력에 명분을 주고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탈 행위입니다.

이중적인 미국의 행태


이번 사태를 보면서 다른 나라에 대하여 툭하면 인권 유린을 경고하는 미국의 이중적인 행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자국민이지만 피부색이 다르다고 대놓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미국의 현실이 중국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내부의 모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의 인권은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미국의 진짜 관심은 인권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영향력 행사에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국의 인권을 논하기 전에 자국의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불에 탄 경찰차, 시위대에 몰매를 맞는 경찰들은 추락한 미국 공권력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폭주하고 있는 트럼프를 보면 이런 바램이 부질없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래도 미국이 이렇게 중심을 잃고 내부 혼란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미국이 빨리 이번 폭동 사태를 마무리하고 안정을 찾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