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폭력, 6.4 중국 천안문 사태 톺아보기

미국과 중국 양국의 긴장이 날로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들 나라에서는 연이은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 진압 등 충돌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 경찰에 의한 흑인에 대한 고의적인 살인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로 큰 홍역을 치르고 있는데 중국 또한 홍콩 보안법 통과로 인하여 홍콩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 나거나 일어날 조짐이 있어 역시 조용할 것 같지 않은 상황입니다.

중국은 과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대하여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전력이 있습니다. 바로 1989년 4월 15일부터 시작되어 6월 4일 무력 진압으로 종료되었던 중국 천안문 사태입니다. 중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수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있었던 대학살 사건인데 이 사건은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현대사의 대표적인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 사건이자 비극입니다.

지금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안법 반대의 근원적 두려움은 유혈 진압을 꺼리지 않고 인권을 유린하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거부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 천안문 사태는 어떤 사건이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976년 4월의 중국, 1차 천안문 사태

자금성으로도 유명한 관광 명소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은 역사적인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국 건국을 선포한 장소도 천안문 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 문화 혁명과 같은 악수를 두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말년에는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4인방이라 일컫는 무리들에 의하여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정치인인 저우언 라이가 1976년 1월에 사망하고 그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일어나며 마오쩌둥과 4인방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와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마오쩌둥과 자우언라이

그해 4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으며 중국 공산당은 시위 군중을 반혁명으로    

몰아 붙이며 철저하게 탄압, 제압하며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체포되며 막을 내렸습니다. 1차 천안문 사태는 13년뒤에 있을 2차 천안문 사태만큼의 피해자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실각했던 개혁파 정치인 덩샤오핑은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다시 등장하여 1981년 이후는 사실상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1976년 1차 천안문 사태

1989년 4월의 중국, 2차 천안문 사태

오늘날 언급되는 천안문 사태는 1차와 다르게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1989년 4월부터 6월까지 이어졌던 2차 천안문 사건을 일컫습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중국은 이전과는 다르게 개혁, 개방 노선을 채택하여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격화되고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중국 공산당 관료 중에도 상대적으로 정치적으로도 개혁 개방적인 인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이 주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1989년 4월 15일에 사망한 중국의 후야오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도 그런 부류의 인사로 개혁파로 불렸던 인물이었습니다.

후야오방 총서기

그런 그가 사망하면서 1976년 저우언라이 사망 당시도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부에 대한 비판을 늘어 놓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속도를 높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76년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는 나아졌지만 정치는 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는데 그들은 공산당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치적으로도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시작되었던 시위의 규모는 차츰 커져가고 폭력적인 양상도 띠게 됩니다. 또한 다른 도시로 퍼져나가는 등 중국 공산당을 긴장시키게 됩니다. 이때 중국의 관영신문인 인민일보는 사설을 통하여 ‘소수의 사람들이 학생을 이용하여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며 반혁명 단체의 의한 음모로 몰아갑니다. 중국 당국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데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동에 대하여 트럼프가 언급한 ‘안티파’라는 테러 조직에 의하여 야기된 폭력, 테러로 몰아가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주동세력이었던 학생들은 중국 지도부와의 직접 대화를 요구하였으며 이에 당시 개혁파 서기였던 자오쯔양은 일부 공감을 표시하며 평화적인 해결의 가능성도 있었으나 강경파 총리 리펑은 시위를 중지하고 해산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5월 19일 자오쯔양 서기가 학생들 앞에 서서 보복은 없을 것을 약속하며 철수를 권하였으나 학생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자오쯔양 서기의 공식적인 활동도 이게 마지막이 되며 그는 실각하게 됩니다.

자오쯔양 서기

이후 20일 중국은 베이징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대가 투입되며 탱크도 배치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학생 지도부 등 시위를 이끌었던 세력들 간에 한국의 1980년 5월의 서울과 같이 철수할 것인지 끝까지 투쟁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베이징 시위대는 투쟁을 선택합니다. 막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덩샤오핑은 이 시위를 반혁명으로 몰아 붙이며 무력 진압을 지시하고 작전을 승인합니다.

피의 밤 6월 3일~6월 4일 아침

6월 2일 단식농성에 들어갔던 시위대에게 3일 밤 무장 군인, 차량, 탱크가 광장으로 진입하며 무차별 살상을 저지르며 피로 가득한 밤이 시작됩니다. 탱크로 사람을 깔고 가기도 하고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진압은 6월 4일 아침까지 이어지며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 당국이 발표한 공식 사망자는 218명이지만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비공식적으로 최소 2,600명에서 1만 4천명 가량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참극이었습니다.

개혁 개방의 와중에서 누적된 빈부격차와 사회 갈등, 중국 공산당내 갈등, 사회 모순이 한번에 터지면서 일어났던 사건인데 중국 당국의 철저한 탄압과 학살로 마무리되며 이후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는 더욱 견고해집니다. 마치 80년 광주 학살을 떠올리게 하는 비극이 중국에서 재현된 것인데 중국은 지금도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어 중국에서는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시위 지도부는 설마 이렇게 피를 부르는 참극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인민해방군이 인민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탱크로 짓밟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큰 오산이었습니다.

홍콩에서는 지금까지 일국양제 하에서 중국 내에서는 유일하게 천안문 사태를 추모해 왔는데 올해는 당국에 의하여 아예 원천 봉쇄되었습니다. 홍콩이 중국에 맞서는 순간 그들도 1989년 천안문에서 당했던 것과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 공산당이 건재하는 한 1989년 2차 천안문 사태도 계속 은폐될 가능성이 크지만 언젠가는 중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올 것입니다. 국가가 자행했던 폭력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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